DNA를 전기영동하여 관찰되는 band 중에서 특정한 band를 gel로부터 유리해낼 수가 있다. 이 방법은 재조합 DNA를 만들때 대단히 중요하게 쓰이는 기술이므로 보다 회수율이 높고 용출(elution)된 DNA의 순수도가 보다 높고, 또한 보다 빠르고 간편하게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 계속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Gel에서 DNA를 회수하는 많은 방법 중에서 대표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전기영동에 의한 DEAE-cellulose membrane 위로 DNA 조각의 이동
2) 투석 주머니속에서의 전기 용출(electroelution)
3) Low melting agarose gel로부터 DNA 용리
4) Gene Clean kit를 이용한 추출
5) QIAquick kit(QIAGEN)를 이용한 추출
DEAE-cellulose membrane 위에서의 전기영동은 여러 DNA를 동시에 분리하고 0.5 kb~5 kb 크기의 DNA를 분리함에 있어서 효율성이 높은 비교적 간단한 방법이다. Membrane으로부터 분리되는 DNA는 순도가 높으므로 거의 모든 용도로 사용이 가능하다. 투석 주머니속에서의 전기 용리는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불편한 방법이지만 5 kb보다 큰 DNA 조각들을 분리하는 데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순수도가 높다. 낮은 온도에서 녹는 agarose gel로부터 DNA를 분리하는 방법은 위의 두 방법에 비해 분리되는 DNA 양이 적지만 제한효소나 ligation에 필요한 효소를 gel에 직접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요즘 실험실에서는 kit를 이용한 방법이 가장 많이 쓰인다. 무엇보다도 빠르고 간편하며 회수율과 순수도도(계속 개발되고 있음) 높기 때문이다.
1) Gene Clean kit를 이용한 추출
Gene Clean kit에는 glassmilk라는 silica matrix가 들어 있다. Glassmilk는 쌍가닥 또는 외가닥 DNA에만 특이하게 결합하므로 DNA를 신속하게 분리할 수 있다. DNA 분리에 필요한 시간은 보통 15∼20분 정도이며, DNA 회수율은 80%(크기가 500 염기쌍 이하이면 효율은 더 낮아진다), 순수도는 cesium chloride를 이용하여 원심분리한 경우와 비슷하거나 더 좋은 편이다.
실험방법
1. 적어도 100 ng 정도 되는 DNA band를 날카로운 칼로 잘라내어 미세원침관으로 옮긴 다음 gel의 무게를 재고 3배 무게만큼 6 M NaI 용액을 첨가한다. 즉 200 mg의 gel 조각에 600 μl의 용액을 첨가한다.
2. 45∼55°C에 10분 두어 gel을 완전히 녹인다. 2~3분마다 원침관을 흔들어 섞어준다.
3. Glassmilk를 5 μl 첨가한 후 진탕하여 섞는다. Glassmilk는 무거워 가라앉아 있으므로 잘 섞어서 사용해야 한다.
* Glassmilk 1 μl는 1 μg 정도의 DNA와 결합한다. DNA양이 소량인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5 μl을 첨가하는 것이 좋으며 5 μg 이상이 되면 추가되는 DNA 1 μg 당 glassmilk 1 μl를 첨가한다.
4. 실온 또는 얼음에서 5분 두어 DNA와 glassmilk가 결합되게 한다. 조심스럽게 흔들어 주어도 좋다.
5. 실온에서 최고속도로 15초동안 원심분리하여 glassmilk를 가라앉힌 후 상층액을 제거한다.
6. 세척용액(washing solution) 500~800 μl를 첨가한 후 진탕하여 잘 섞는다.
* 세척용액(50% ethanol, 10 mM Tris-Cl, pH 7.4, 0.5 mM EDTA, 50 mM NaCl)은 상품 구입시에 ethanol을 제외한 stock solution형태로 제공된다. 설명서를 참고하여 ethanol과 증류수로 만든 용액은 -20°C에 보관하였다가 필요한 경우에만 꺼내어 사용한다.
* 5 kb 이상인 DNA를 gene clean하는 경우에는 진탕하지말고 pipetting으로 조심스럽게 부유하는 것이 좋다. 심하게 vortex하면 DNA가 부서질 위험이 있다.
7. 다시 위와같이 원심분리하여 glassmilk를 가라앉힌 후 상층액을 제거한다.
8. 위의 6, 7 과정을 2회 더 반복한다.
9. 상층액을 완전히 제거한 후 10~20 μl의 증류수(또는 TE, pH 8.0)를 첨가하여 섞은 후, 45∼55°C water bath에 5분간 둔다. 이 과정에서 glassmilk와 결합해 있던 DNA가 증류수로 녹아나온다.
10. 실온에서 15,000 rpm으로 30초동안 원심분리하여 glassmilk를 가라앉힌 후 DNA가 녹아 있는 상층액을 조심스럽게 새 미세원침관으로 옮긴다.
* 이 과정에서 한번 용출한 DNA는 처음 양에 비하여 약 80% 정도가 된다. 9, 10 과정을 한번 더 반복하면 거의 95% 이상의 회수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2) QIAquick kit를 이용한 추출
이 kit는 silica-gel membrane을 이용한 column에 DNA가 결합함을 이용한 것이다. 회수율과 순수도가 높고 아주 간편하여 많이 쓰고 있다. 이 kit에 포함된 용액들은 그 성분을 정확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
실험방법
1. DNA band를 날카로운 칼로 잘라내어 미세원침관으로 옮긴 다음 gel의 무게를 재고 3배 무게만큼 QX1 용액을 첨가한다. 즉 200 mg의 gel 조각에 600 μl의 용액을 첨가한다.
* 2% 이상의 agarose gel인 경우 6배의 용액을 쓴다. 또 만약 gel 무게가 400 mg이 넘으면 여러개로 나누어서 실험한다.
2. 50°C에 10분 두어 gel을 완전히 녹인다. 2~3분마다 원침관을 흔들어 섞어준다.
3. 처음 gel 무게만큼 isopropanol을 첨가하고 섞는다. (200 mg이면 200 μl)
4. QIAquick spin column을 collection tube에 설치하고 DNA 용액을 첨가한 다음 12,000 rpm에서 1분간 원심분리한다.
5. 밑으로 빠진 용액을 버리고 다시 위치시키고 0.5 ml의 QX1 용액을 첨가하고 다시 원심분리한다.
6. 세척을 위해 0.75 ml의 PE 용액을 가하고 다시 원심분리한다. 여기에서 빠진 용액을 버리고 그대로 다시 1분간 원심분리하여 완전히 용액을 제거한다. 이때, column 가장자리의 턱에 걸린 용액이 아주 소량 남으므로 이를 흡입기나 pipette을 이용하여 제거한다.
7. Column을 새 미세원침관에 설치하고 증류수나 TE, pH 8.0 50 μl를 중앙 membrane에 떨어뜨리고 1분간 최고속도로 원심분리한다. 만약 30 μl를 쓰는 경우는 용액을 떨어뜨린 후 1분간 두었다가 원심분리한다. 용출된 부피는 약 2~3 μl 줄어있게 된다.
Agarose gel electrophoresis is a method used in molecular biology to separate DNA strands by size, and to estimate the size of the separated strands by comparison to known fragments (DNA ladder). This is achieved by pulling negatively charged DNA molecules through an agarose matrix with an electric field. Shorter molecules move faster than longer ones.
>>Agarose gel 전기영동
시판되는 agarose는 완전히 순수 분리된 것은 아니며 다른 다당류나, 염, 단백질 등이 혼합되어 있으며, 이런 물질들이 포함된 정도에 따라 전기영동시 DNA가 이동되는 정도나 DNA가 gel에서 분리되는 정도가 달라진다. 따라서 효소 억제제와 nuclease가 함유되어 있지 않으며 ethidium bromide로 염색할 경우 형광의 배경을 극소로 하기 위한 특별히 정제된 agarose를 구입하여 사용한다.
Gel의 기능을 유지하면서 낮은 온도에서도 녹을 수 있게 화학적으로 변형된 low melting agarose는 gel에서 쉽게 DNA를 용리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인데 현재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또 일부 시약회사에서는 아주 작은 DNA 조각(10∼500 bp)을 분석할 때 이용할 수 있는, 낮은 온도에서 gel을 형성하는 agarose를 시판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agarose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agarose보다는 DNA가 잘 분리되지만 polyacrylamide를 이용하여 얻은 결과보다는 그 분리되는 정도가 낮다. 이러한 gel은 agarose의 농도를 높게 하여 사용하므로(4∼10%) DNA 조각들을 gel에서 용출한 후에 제한효소를 처리하면 효소작용이 억제되는 수가 많다.
Agarose gel 전기영동시 DNA의 이동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
1) DNA 분자의 크기가 클수록 느리게 이동한다.
2) Agarose의 농도가 높을수록 느리게 이동한다.
3) DNA 형태(구조)에 따라 이동속도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supercoiled DNA가 가장 빨리, 그다음 linear DNA, open circular DNA의 순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4) 부하되는 전압이 높을수록 이동속도가 빠르다.
5) 전기장의 방향도 이동속도에 영향을 미친다.
6) Ethidium bromide는 DNA 이동속도를 15% 정도 감소시킨다.
7) 전기영동 완충용액의 성분과 이온강도도 전기영동 속도에 영향을 준다.
* 여러 DNA 형태를 알아내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ethidium bromide의 양을 증가시켜 전기영동을 시행하는 것이다. Ethidium bromide의 농도가 증가하면 더 많은 ethidium bromide가 DNA와 결합하게 된다. Supercoiled DNA에서 negative superhelical turn은 차차 제거되고 반지름이 증가하게 되어 이동속도는 느려지게 된다. Superhelical turn이 남아있지 않은 적절한 색소의 농도에서 이동속도는 가장 느리다. 여기에 더 많은 ethidium bromide가 첨가되면 positive superhelical turn이 생기게 되고 DNA 분자는 더 치밀해지며 이동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진다. Linear와 open circular DNA의 이동은 DNA가 중성의 전하를 띠거나 ethidium bromide에 의해 굳어지는 경우에 이동속도가 느려진다.
* 낮은 전압에서 선형으로 된 DNA 조각의 이동속도는 부하되는 전압에 비례한다. 그러나, 전기장에서 전류의 흐름이 커짐에 따라 높은 분자량을 가진 DNA 조각의 이동속도는 빨라지게 되므로 전압이 올라감에 따라 agarose gel에서 DNA 분리 효과가 감소된다. 2 kb보다 큰 DNA 조각들의 분리를 최대로 하기 위해서는 agarose gel에 5 V/cm 이상의 전압을 부하시켜서는 안된다.
A. Agarose gel 전기영동
실험방법
1. 깨끗하고 건조한 유리판(또는 전기영동 기구에 꼭 맞게 만들어진 플라스틱판) 사방 모서리를 주형의 모양이 되도록 테이프로 감은 후 수평으로 맞추어진 판 위에 주형을 둔다.
* 테이프로 감을 필요가 없는 기구가 요즈음 많이 시판되고 있다.
2. 전기영동 tank를 채우고 gel 제조에 이용하기 위한 전기영동 완충용액(1x TAE)을 충분히 준비한다. 다음 표를 이용하여 분리하고자 하는 DNA 크기에 해당하는 양의 agarose 분말과 완충액을 삼각 플라스크 또는 유리병에 담는다.
[#M_Agarose Gel Electophoresis (Korean)|less..|
Amount of agarose in gel
(%[w/v])
Efficient range of separation oflinear DNA molecules (kb)
0.3
5~60
0.6
1~20
0.7
0.8~10
0.9
0.5~7
1.2
0.4~6
1.5
0.2~3
2.0
0.1~2
* 1x TAE 용액은 먼저 50x 용액을 제조한 다음 희석해서 쓴다. 50x TAE 1 liter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Tris 242 g, glacial acetic 57.1 ml, 0.5 M EDTA, pH 8.0 100 ml를 녹여 증류수로 1 liter까지 채운다.
* 전기영동 tank와 gel은 동일한 전기영동 완충액을 사용해야 한다. 이온강도 또는 pH에 약간의 차이만 있어도 DNA 조각의 이동속도에 크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3. Microwave oven를 이용하여 agarose가 녹을 때까지 서서히 가열한다.
처음에는 녹지 않지만 녹은 후에는 투명하게 된다.
Electrophoresis buffer solution
Electrophoresis를 할 때 gel이 잠기는 buffer solution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주로 TAE와 TBE가 많이 쓰입니다. TAE는 주로 agarose electrophorsis에, TBE 는 DNA sequencing에 쓰입니다. 조성은 다음과 같으며 대량을 쓰므로 미리 많이 만들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희석해서 부어서 씁니다.
Commonly used electrophoresis buffers
Buffer
Concentrated stock solution (per liter)
Tris-acetate (TAE)
50x
242 g Tris base
57.1 ml glacial acetic acid
100 ml 0.5 M EDTA (pH 8.0)
Generally used for agarose EP
Tris-borate (TBE)
20x
121.1 g Tris base
61.7 g boric acid
7.44 g Na2EDTA-2H2O
Generally used for DNA sequencing
Gel loading buffer
그리고 DNA 시료를 담는 loading buffer가 필요합니다. 이 buffer는 분자량이 큰 glycerol 등 무거운 물질이 함유되어 있어서 DNA가 든 시료를 gel 속에 잘 가라앉히고, 파란색을 내는 bromophenol blue가 들어 있어서 electrophoresis하는 동안에 현재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나 눈으로 보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다음과 같은 몇몇 종류가 쓰입니다.
Gel loading buffers (6x)
[#M_Agarose Gel Electophoresis (Korean)|less..|
I
0.25% bromophenol blue
0.25% xylene cyanol FF
40%(w/v) sucrose in water
II
0.25% bromophenol blue
0.25% xylene cyanol FF
15% Ficoll(Type 400) in water
III
0.25% bromophenol blue
0.25% xylene cyanol FF
30% glycerol in water
IV
0.25% bromophenol blue
40%(w/v) sucrose in water
4. 용액을 60°C까지 식힌다. 필요하면 ethidium bromide를 최종농도 0.5 μg/ml이 되도록 가하고 잘 혼합한다.
* Ethidium bromide(EtBr)은 DNA 염기 사이로 끼어드는 평면구조를 가진 그룹을 지니고 있어서 이 그룹이 DNA 염기에 결합하면 유리형의 ethidium bromide보다 형광이 증가된다. 파장 254 nm에서의 자외선은 DNA에 흡수되어 이 색소에 전달되고 파장이 302 nm와 366 nm에서는 색소 자체에 자외선이 흡수되어 590 nm의 주황색 형광 가시광선을 내게 된다. Ethidium bromide는 한가닥과 쌍가닥 DNA및 RNA 검색에 모두 사용할 수 있으나 염료의 친화성이 외가닥에서보다 쌍가닥에서 더 강하다.
* Ethidium bromide 원액은 증류수에 10 mg/ml로 녹아 있는 용액으로, 이 용액의 보관은 빛이 차단된 용기에 담아서 실온에 보관한다. 이 원액을 0.5 μg/μl로 희석해 두고 이를 gel에 혼합한다.
* 주의: Ethidium bromide는 강력한 발암물질이고 독성을 지니므로 이 염색액을 다룰 때에는 반드시 비닐장갑을 사용한다. 사용 후에 이 용액은 정화한 후 버려야 한다.
5. Comb을 agarose를 모두 부었을 때 주형의 밑바닥으로부터 0.5∼1.0 mm정도 떨어져서 위치하여 홈을 형성할 수 있도록 고정시킨다.
6. 따뜻한 agarose 용액을 주형에 붇는다. Gel은 3∼5 mm 두께가 되도록 하고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한다.
7. 실온에서 20∼30분 두어 gel이 완전히 굳은 후 comb과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제거한 다음 gel을 전기영동 tank안에 설치한다.
* 0.5% 이하인 낮은 농도를 가진, 낮은 온도에서 녹는 agarose로 제조한 gel은 4°C 이하에서 굳힌 다음 냉장실에서 전기영동해야 한다.
8. Gel을 1 mm 정도의 두께로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양의 전기영동 완충용액(1x TAE)을 가한다.
9. DNA 시료를 전기영동용 loading 완충용액과 혼합한 후 pipette을 이용하여 잠겨있는 gel의 홈에 혼합액을 조심스럽게 가한다.
* 전기영동용 loading 완충용액은 보통 6x로 제조하여 사용한다.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우리 실험실에서는 type II (0.25% bromophenol blue, 0.25% xylene cyanol FF, 15% Ficoll[type 400, Pharmacia]을 증류수에 녹인 것. Ficoll이 잘 안녹으므로 50°C에 약 1시간 두어 녹인다)를 쓴다. 만약 DNA 용액이 20 μl이면 6x 용액을 4 μl 첨가하면 된다.
* 전기영동할 수 있는 DNA의 최고량은 DNA의 크기나 조각의 수에 따라 달라지며, ethidium bromide로 염색하여 사진상으로 판독할 수 있는 최소량은 0.5 cm 넓이(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넓이)의 홈 하나당 2 ng 정도라고 한다. 0.5 cm 넓이의 홈에 DNA가 500 ng이상 존재하면 DNA 양이 너무 많아서 DNA 띠가 끌려 선명치 않게 나타나며, 이 현상은 DNA 크기가 클수록 심해진다. 보통 DNA 분자는 0.5 cm 홈 하나당 100∼200 ng이면 분석 가능하다. 시료가 여러가지 다른 크기로 된 많은 DNA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을 때(예: genomic DNA를 제한 효소로 절단할 때) 홈당 20∼30 μl의 DNA를 가하여 분석할 수 있다.
* 한 홈에 가할 수 있는 최대부피는 홈의 3차원적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0.5 cm x 0.5 cm x 0.15 cm의 홈에는 37.5 μl를 가할 수 있다. 그러나, 옆의 홈에 가한 시료와 혼합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gel을 좀 더 두껍게 제조하거나 DNA를 에탄올로 침전시켜 DNA 부피를 줄여서 가하는 것이 좋다.
* 시판되는 알려진 크기의 표준 DNA를 크기 표식자를 같이 전기영동하여 모르는 DNA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 크기의 비교가 가능한 것은 linear DNA임을 주의한다. 주로 많이 사용되는 표식자에는 1 kb ladder, 123 bp ladder, λ Hind III ladder(전기영동 패턴 보기) 등이 있다.
10. Gel tank의 뚜껑을 닫고 DNA가 양극 쪽으로 이동해갈 수 있도록 양극에 빨간 도선을, 음극에 검정 도선을 연결하고, 전극간의 거리 1 cm당 1∼5 V의 전압을 가한다.
* 전기영동을 시작하면 전기분해에 의하여 양극과 음극에서 기포가 발생하고 시약에 섞인 염료가 홈으로부터 이동해가는 것이 보인다. Bromophenol blue와 xylene cyanol FF가 적당한 거리만큼 이동해갈 때까지 전기영동을 시행한다.
* 전기영동하는 동안 ethidium bromide는 음극 쪽으로(DNA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 가므로 오랫동안 전기영동을 하면 ethidium bromide는 gel에서 모두 빠지게 되어 작은 DNA 조각을 감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경우에는 gel을 ethidium bromide가 0.5 μg/ml 포함된 증류수나 1x TAE 용액에 30∼45분간 담가 염색하였다가 관찰하면 된다.
* Gel에 ethidium bromide가 함유되어 있으면 전기영동하는 동안 어느 시기에나 자외선하에서 관찰이 가능하다. 그러나, gel에 ethidium bromide를 함유시키지 않고 전기영동한 후 gel을 ethidium bromide가 0.5 μg/ml 포함된 용액에 30~45분간 더 염색하였다가 관찰하는 것이 더 선명한 DNA 띠를 관찰할 수 있다는 이유로 후자를 선호하는 실험자들도 있다. 이 때 탈색 과정은 보통 필요치 않으나, 10 ng 이하의 적은 양의 DNA를 검출할 때에는 결합하지 않은 ethidium bromide가 gel에 묻어 있으면 바탕이 흐려 보이므로 증류수나 1mM MgSO4에 담가 실온에서 20분간 탈색하면 DNA를 더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11. 전기영동이 끝나면 전기를 끄고 도선을 제거한 후 gel tank의 뚜껑을 연 다음 gel을 자외선하에서 관찰하고 촬영한다.
[Mac] iTunes 에서 한글 태그가 깨질 때 ( OS X - Tiger, 언어옵션 English - 한글 순)
ㅇ 일단 아래 있는 gura Unzip으로 음악파일의 압축을 풀면 파일이름이 정상으로 보임.
ㅇ iTunes 어플리케이션의 Show Package Contents 로 들어가서 Contents/Resource/ 폴더의 English.lproj 를 압축해놓고(백업차원) 지워 버린다.
ㅇ 태그에 문제가 있는 파일들을 iTunes에서 선택하여 우클릭 - ID3 태그 변환... 메뉴 선택하고 1. 텍스트문자변환 - 유니코드 복귀, 2. 텍스트문자변환 - ASCII를 ISO Larin-1로 순으로 만져준다. 그러면 깨졌던 ID3 태그의 변환 완료.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2005.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stayed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mother was a young, unwed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graduated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school.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지금 뒤돌아보면 참으로 힘든 순간이었지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를 하니 평소에 흥미없던 필수과목 대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of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great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문자끼리 결합될 때 다양한 형태의 자간으로 만들어지는 굉장히 멋진 글씨체였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인 것이었고, 전 그 것에 흠뻑 빠졌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사실, 이 때만해도 이런 것이 제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매킨토시를 처음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아마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인쇄술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제 인생의 고비 때마다 힘이 되워줬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in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잘 맞는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은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company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become my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film, Toy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and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current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엄청난 일들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세상이 당신을 속일지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쇼.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만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앞에서는 모두 밑으로 가라앉고, 오직 진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is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six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certainty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당장 죽는 건 원치 않습니다.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다 죽을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삶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이란 삶의 또다른 모습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단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잡음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desktop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polaroid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and then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엄지들고 차를 유혹해서 빌려타며 여행하는 것/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낮에 시내에 갔다가 이 시기에만 마실 수 있는 페더바이써(Federweisser)를 사왔다.
와인을 만들기 위해 술을 담갔지만 완전히 숙성되기 전에 주스처럼 먹는 와인이다.
발효되는 중이라 병을 열어 놓은 채로 파는데, 끊임없이 기포가 올라오고.. 색깔은 막걸리처럼 탁하다.
맛은 사과주스, 빛깔은 바이쩬비어, 알콜도수는 와인이라고 한다.
가격은 단돈 2.10유로! 이동네는 화이트 와인이 유명한데, 10유로 넘는 와인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집 식탁
이 와인글라스들은 마인츠에 있는 커다란 SCHOTT 공장 아웃렛에서 한잔에 거금 5유로를 주고 구입했는데, 낮에 백화점에 갔더니 똑같은건 아니지만 20~30 유로에 팔더라. (SCHOTT 는 실험할때 보통 사용하는 round-bottomed flask에서 쉽게 볼 수 있는 brand이다.)
프랑스가 레드 와인의 나라라면 독일은 화이트 와인의 나라다. 화이트 와인이라고 해도 라인강 서쪽과 동쪽의 화이트 와인의 맛은 많이 다르다.
정말 독일다운 화이트 와인의 맛을 보려면 라인강 동쪽의 프랑켄 지역으로 가보아야 한다.
게다가 10월은 독일 곳곳의 포도원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 익숙한 리듬에 맞춰 포도를 따는 분주한 손길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한치의 흐트러짐없이 아름답다.
●프랑켄:복스보이텔에 담은 바로크의 맛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독일 와인하면 ‘모젤’을 떠올린다. 모젤 와인이생산되는 모젤강 유역, 정확히 모젤-자르-루버 지역은 라인강 서쪽에 있다. 프랑스의 주요 와인 생산지역인 알자스 로렌 지방이 프랑스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독일적인 것처럼 독일의 모젤-자르-루버 지역은 독일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프랑스적이다. 역사적으로도 이 지역은 한때는 프랑스가, 한때는 독일이 번갈아가며 장악해 비슷한 점이 많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것도 그렇고 가톨릭 전통, 농촌정서 등이 강한 문화적 전통도 그렇다.
그러나 프랑켄은 라인강을 넘어 동쪽으로 송곳처럼 파고 들어가는 와인지역이다. 이 지역은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 겨울에 많이 춥고 여름이 몹시 덥다. 또 겨울이 빨리 찾아와 포도가 서리를 맞을 가능성도 높다. 이런 기후조건 때문에 이곳에서는 잔당(殘糖)이 낮은 드라이하고 흙냄새가 나는 ‘남성적’ 화이트 와인이 많이 생산된다.
모젤 등 라인강 서쪽의 고급 화이트 와인이 주로 리슬링 품종의 것이라면 이곳의 고급 화이트 와인은 질바너 품종이다. 리슬링은 상쾌하고 가벼운데 비해 질바너는 풍성하다. 독일와인협회의 케리 스튜어트 여사는 질바너를 가리켜 ‘섹시 질바너’라고 부른다. 그녀는 “질바너 와인에서는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섹시한 여자의 몸처럼 잘 짜여진 바디(body)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곳 포도밭은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거의 모두 남향의 비탈진 경사에 만들어졌다. 경사지역에 있다보니 기계작업이 힘들어 대개 사람의 손으로 포도농사를 한다. 대신 아우스레제나 베렌아우스레제같은 고급스러운 와인을 많이 생산할 수 있다. 그 작업은 오늘날 대부분 동유럽에서 온 노동자들이 하고 있다.
프랑켄의 중심도시는 뷔르츠부르크. 이 도시에는 슈타트리히 호프켈러(Staatlich Hofkeller, 1128년 설립), 율리우스슈피탈(Juliusspital, 1579년 설립), 뷔르거슈피탈(B¨urgerspital, 1376년 설립) 등 독일에서 열손가락안에 꼽히는 유서 깊은 와인 창고가 있다.
특히 국가소유의 호프켈러는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레지덴츠 궁’이라는 건물 지하에 있다. 레지덴츠 궁은 18세기 발타자르 노이만이 지은 독일 바로크 양식의 정수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옮겨놓았나 싶을 정도로 화려하다. 그러나 이곳 호프켈러의 책임자인 안드레아스 베커 박사는 “레지덴츠 궁의 지상만 보는 것은 건물의 반쪽을 본 것에 불과하다”며 “독일에서는 지상의 소유권과 지하의 소유권이 다를 정도로 지하 공간의 와인창고를 중요시한다”고 말했다.
프랑켄 지역의 와인은 ‘복스보이텔’이라고 불리는 주머니 모양의 고풍스러운 병에 담는게 특색이다. 뷔르거슈피탈의 판매책임자 라인하르트 사우어는 “옛날 사냥을 다닐 때 염소고환가죽에 물을 담아 다녔는데 그 모양을 본따서 와인병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복스보이텔이 쓰이는 지역은 그 특이함 때문에 ‘복스보이텔 루트’라고 불린다.
●라인강 서쪽:태양의 키스를 받는 곳
라인강 서쪽으로 넘어가면 라인강 동쪽 프랑켄과는 확연히 다른 온기가느껴진다. 라인강 서쪽에서도 모젤-자르-루버 지역 남쪽에 위치한 라인헤센과 팔츠 지역은 독일 최대의 와인생산지대다. 이 곳의 포도밭은 프랑켄과는 달리 완만한 구릉지대와 평지로 드넓게 펼쳐져 있다.
라인헤센의 중심도시는 마인츠다. 독일 3대 성당 중 하나인 마인츠 대성당 앞에서는 화, 금, 토요일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과일 야채시장이 열린다. 포도수확기를 맞은 요즘 이곳에서는 가볍게 페더바이세(Federweisse)라는 음료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본격적인 숙성단계에 들어가기 전 단계의 초기 와인인 페더바이세는 와인과는 달리 탁한 색깔에 저알코올이 과일주스를 연상시킨다.
인근 시골마을인 베흐트하임을 방문했을 때 게일 비어센크는 자신의 양조장을 구경시켜주면서 페더바이세를 한잔 권했다. 독일인은 누구나 페더바이세에는 양파케이크(Zwiebelk¨uchen)가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양파케이크를 곁들인 페더바이세의 달콤한 맛은 요즘 아니면 맛보기 어렵다.
팔츠는 온화한 기후와 풍광으로 인해 ‘독일의 토스카나 지방’으로 불린다. 이곳 바트베르크자버른에서 기계화된 대규모 와인양조장을 운영하는 알렉산더 로르히는 점심으로 자우마겐(Saumagen)이란 음식을 내놓았다. 물론 자신의 포도밭에서 생산된 향긋한 뮐러-투르가우 와인도 잊지 않았다. 뮐러-투르가우는 깔끔하고 짜릿한 리슬링이나 묵직한 질바너처럼 스타일리시하지는 않지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와인으로 선호된다. 돼지창자에 돼지고기 감자 야채 등을 넣어만든 자우마겐은 서민적 풍모의 헬무트 콜 독일 전 총리가 가장 좋아했던 이 지방의 전통음식. 와인과 잘 어울리고 한국인의 입맛에도 딱 맞는다.
1998년 10월 제대를 1개월도 안남겨두고 말년휴가를 나가 알바를 해서 핸드폰을 샀다.
왜 휴가때 알바를 했냐면.. 제대하기 1달쯤 전에 당시 사귀던 여친한테 이별을 통보받았는데, 휴가 나가니 막상 할 일이 없더라구..
아무튼, 번호는 017-244-0393. 까만 삼성 폰이었다.
부대에 복귀해서 자랑하던 기억이 있는데,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해서 다른 졸병을 시켜 공중전화에서 전화좀 해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